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해하기 쉬운 자본주의?, 자본?, 칼 마르크스는 누구?
    일상.생각 2020. 5. 6. 18:22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쓰인 고전 « 자본론 »에는 비판을 위한 의도에는 부합하지 않게도 자본과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현대 사회를 살면서 꼭 알아야할 자본과 자본주의.
    “자본이란 사회적 관계”라고 정의한 칼 마르크스는 사회적 관계는 어떻게 구성되었고, 그 관계는 자본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인간은 여러 가지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그 관계에 얽혀있다.
    “자본이란 사회적 관계”라는 말은 쉽게 하자면, 현시대의 인간은 곧 자본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름만 들어도 어려운 « 자본론 »,
    또 칼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바쁜 사회를 살면서 그 개념만 간단하게 이해할 수는 없을까?

     

     

     

    자본이란 사회적 관계이다

    자본론 Das Kapital
    저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카를 마르크스와 그의 시대 그리고 『자본론』

    공장 굴뚝에서 뿜어 나오는 연기로 검게 물든 하늘 아래에는 공장들이 가득하고 거기서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 그중 한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열두 살 소년 머레이(Murray)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릇 만드는 틀을 운반하며 녹로를 돌립니다. 내가 일하러 오는 것은 아침 6시인데, 4시에 올 때도 있습니다. 나는 어젯밤을 새워 오늘 아침 6시까지 일하였습니다. 그저께 밤부터 자지 못했습니다. 한 아이를 제외하고는 오늘 아침에도 모두 왔습니다. 나는 1주일에 3실링 6펜스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주에 나는 이틀 밤을 새워 일하였습니다.

    『자본론(Das Kapital)』의 저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가 살던 시대는 그랬다. 엄마, 아빠, 아들, 딸 등 온 가족이 공장에서 일을 하더라도 하루 세끼 먹을 돈도 제대로 벌지 못하던 시대에 『자본론』은 씌어졌다.

    1818년 프로이센의 트리어에서 태어난 마르크스는 대학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도였다. 하지만 그에게 철학이란 다른 철학자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세계의 원리를 밝히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철학이란 세계를 변화시키는 문제였다.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 그것은 마르크스에게 혁명을 의미하였다. 열두 살 난 소년이 일주일에 이틀에서 삼일은 밤을 새워 일해도 3실링 6펜스 1) 밖에 받을 수 없는 그런 세계, 즉 자본주의 세계를 혁명하는 것이었다. 바로 코뮨주의 2) 혁명을.

    1883년 런던에서 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마르크스는 혁명을 위한 활동을 쉬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혁명 활동 중에 썼다. 그는 『자본론』을 통해서 자본주의에 대한 총체적인 분석과 강도 높은 비판을 계획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신의 계획을 완료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오로지 『자본론』 1권만이 '정치·경제학 비판'이라는 부제를 달고 1867년에 그의 손으로 출간되었고, 나머지 두 권은 마르크스의 절친한 친구이며 동지인 엥겔스가 마르크스의 원고를 추려서 미완성인 채로 발간하였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연구가 그의 계획대로 완결되지 못한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론』은 자본이 어떤 것인지, 자본주의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뛰어난 고전임은 틀림없다.

     

     


    '관계'를 알면 '자본'이 보인다

    한 흑인 청년이 드넓은 아프리카 초원을 바람과 함께 내달리고 있다. 그는 부족장의 아들로서 곧 다음 부족장이 될 귀한 신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총을 든 백인 무리가 나타나더니 그를 사로잡아 때리고 밧줄로 묶어 커다란 배에 태웠다. 그 백인들은 노예 사냥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 흑인 청년을 미국 남부의 어느 농장주에게 팔아넘겼다.

    우리의 흑인 청년은 이제 더 이상 차기 부족장이라는 고귀한 신분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하루 종일 돈 한 푼 받지 못하고 땡볕 아래에서 일해야 하는 노예가 되었다. 하루아침에 부족장의 아들이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 사람 자체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그는 아프리카에 있었을 때나 미국 농장에 있을 때나 똑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바로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의 성격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떤 존재의 사회적 성격은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규정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런 사태를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사회적 존재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다. 이러한 이해 방식은 자본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변하지 않는다. 마르크스 이전의 정치·경제학자들은 공장, 기계, 원료, 화폐 그 자체가 원래부터 가지고 있는 고유한 성질 때문에 자본이 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심지어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도 자본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을 전혀 다르게 이해한다. 기계가 자본이 될 수 있는 것은 기계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질 때문이 아니라 그 기계를 자본으로 만드는 일정한 사회적 관계 때문이라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다. 기계는 기계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것은 비로소 자본이 되는 것이다.

     

     


    자본의 일편단심, 가치 증식

    마르크스에게 기계나 공장 혹은 화폐 따위와 같은 어떤 물건 자체가 자본은 아니다. 자본이란 '물건'이 아니라 [물건들에 의하여 매개된]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이다. 그렇다면 자본이라는 사회적 관계는 어떤 점에서 다른 사회적 관계와 구별되는 걸까? 그것은 자본이 '가치'라는 것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회적 관계라는 점에서다. 마르크스는 자본을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고 규정한다. 자본은 스스로 자신의 양을 늘릴 수 있는 가치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가 말하는 가치(value)란 무엇인가?

    A는 운동화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꾸리는 사람이다. A가 운동화를 팔러 가는 시장에서 운동화 두 켤레를 판 값은 청바지 한 벌을 판 값과 같다. 그런데 운동화와 청바지는 그 쓰임새가 전혀 다르다. 운동화는 걷거나 뛸 때 발을 보호하고 편하게 해주는 쓰임새를 가지고 있으며, 청바지는 활동하기 편하고 튼튼하다는 옷으로서의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다른 쓰임새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즉, 전혀 다른 운동화와 청바지가 교환되고 있다. 그것도 '운동화 두 켤레=청바지 한 벌'이라는 계산 아래에서. 도대체 무슨 근거로 시장에 운동화와 청바지는 2:1의 비율로 교환될 수 있는 걸까?

    마르크스는 이 교환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서 '사용가치(使用價値)'와 '가치'를 구분하고 있다. 사용가치란 쓰임새, 곧 유용성을 말한다. 운동화의 사용가치란 발을 보호하는 운동화의 쓰임새(usage)이다. 반면 가치란 이 운동화 - 혹은 청바지 - 를 생산하는 데 들어간 인간의 노동시간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노동시간은 운동화나 청바지를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노동에 들어간 시간이 아니다. 운동화를 디자인하고, 가죽을 잘라서 디자인한 대로 꿰매고, 그 위에 상표를 붙이는 구체적인 노동의 시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치와 관련된 노동은 추상적 인간 노동 3) 이다. 운동화 두 켤레와 청바지 한 벌이 교환될 수 있는 이유는, 운동화 두 켤레를 만드는 데 들어간 추상적 인간 노동 시간과 청바지 한 벌을 만드는 데 들어간 추상적 인간노동 시간이 같기 때문이다.

    즉, 운동화 두 켤레와 청바지 한 벌의 가치가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이렇게 가치가 동등한 것 사이의 교환을 등가교환이라고 한다. 또한 사용가치뿐만 아니라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어떤 물건은 비로소 상품이 된다.

    여기서 자본가의 관심사는 사용가치가 아니라 가치이다. 자본의 밝은 눈에 사용가치는 들어오지 않는다. 자본가가 상품의 유용성에 관심을 가질 때조차 그것은 그 상품의 유용성이 얼마나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에 관련되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상품의 단순한 교환, 즉 유통을 통해서는 가치가 교환될 수 있어도 가치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즉, 유통을 통해서는 가치가 증식될 수 없는 것이다. 상품들 사이에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척도인 화폐가 끼어든다고 하여 달라질 것은 없다. 화폐는 교환 가능성을 나타낼 뿐 그 자체로서는 가치의 증식 가능성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운동화 생산자 A에게로 돌아가 보자. 운동화 한 켤레 당 10,000원씩 두 켤레를 팔고, 그 돈으로 20,000원짜리 청바지를 사는 유통 과정에서 가치는 조금도 증가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동일한 추상적 인간 노동이 교환되었을 뿐이다. 자신이 만든 것을 팔아서 자신의 생활에 필요한 각종 상품들을 구입하는 생산자에게 이것은 별다른 문제가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자본가의 경우에는 가치 증식 없이 가치만을 교환하는 것은 바보짓일 뿐이다.

    1억 원을 투자해서 1억원을 벌어들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언제나 투자한 돈 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것을 욕망한다. 그의 목적은 이윤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억누를 수 없는 정열, 금에 대한 거룩한 갈망이 항상 자본가들의 행동을 규정"하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유통 과정에서는 가치의 증식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가치는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일까? 마르크스는 가치가 어디서 증식되는지 밝히기 위해서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가 상품을 만드는 '생산의 장소'에 주목한다. 이 생산의 장소에서 우리는 '노동력'이라는 아주 독특한 상품을 만나게 된다. 노동력이란 말 그대로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힘이다.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력을 상품으로써 구매하여 노동을 하게 한다. 가치는 노동자의 노동에 의해 자본가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가치의 증식은 바로 여기에서 발생한다.

    또 한 번 우리의 운동화 생산자 A가 등장할 차례이다. A는 이제 자신이 직접 운동화를 생산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그는 B에게 임금을 주고 그를 고용하여 운동화를 만들게 한다. B는 A의 공장에서 하루에 10시간 동안 운동화를 만드는 노동을 했다. 그러나 B는 A로부터 하루에 5시간 동안 노동한 것에 해당하는 돈, 즉 임금을 받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노동력도 하나의 상품이라는 것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추상적 인간 노동 시간을 말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가치란 노동력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추상적 인간노동 시간과 같다. 노동력의 생산이란 한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는 노동력을 유지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비롯한 각종 상품이 필요하다. 이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추상적 인간 노동시간이 바로 노동력 생산에 들어간 추상적 인간 노동시간을 말하는 것이다.

    자본가 A는 B가 자신의 노동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치에 해당하는 화폐를 임금으로 지불하고 그 대신 A는 B로부터 A가 원하는 만큼 B의 노동력을 사용할 권리를 구매한 것이다. 이것이 노동력을 구매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그래서 B는 A의 공장에서 일하는 동안 5시간은 자신의 임금에 해당하는 부분을 위해서 노동한 것이고, 나머지 5시간은 그의 노동력을 구매한 자본가의 이윤을 위해서 일한 것이 된다. 마르크스는 이 나머지 5시간에 생산된 가치를 잉여가치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잉여가치는 자본가 A가 B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데 투자한 가치의 양보다 더 많은 가치의 양, 즉 증식된 가치를 의미한다. 가치의 증식은 이렇게 잉여가치의 생산을 통하여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가치의 입장에서 살펴본다면 어떨까. 자본가가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투자한 가치는 노동자의 노동력 유지비용으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게 사라져버린 가치의 대가로 자본가는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지출(투자!)한 가치 보다 더 많은 양의 가치를 생산할 수 있었다. 노동력을 구매하기 위해 지출되어 노동자의 생활 속에서 사라져버린 가치는 결국에는 그 양을 더욱 늘려서 자본가에게 돌아오게 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증식하는 가치'라는 말의 의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증식하는 가치의 다른 이름이 자본인 것이다.

    자본가에게 잉여가치는 이윤과 연결된다. 이윤이란 증식된 가치, 즉 잉여가치가 화폐로 교환된 것을 말한다. 잉여가치가 화폐의 형태를 취하게 된 형태를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의 실현이라고 하며, 잉여가치의 실현이 바로 이윤인 것이다. 자본가에게 이윤의 획득이란 잉여가치의 생산이며 그것의 실현을 의미한다. 반면, 노동자 입장에서 잉여가치란 착취를 뜻한다. 자신이 노동한 시간에 대한 대가를 전부 받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을 받는 것, 즉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잉여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를 증식하며 이윤을 얻는 것이다. 줄리엣에 대한 로미오의 일편단심보다 더 뜨거운 이윤에 대한 자본의 일편단심.

    그런데 마르크스는 자본의 일편단심이 엉뚱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공황이라는. 자본은 이윤 창출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렇다면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을 줄이면 줄일수록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노동자들도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 노동자는 노동조합을 조직하여 파업을 하면서 자신의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상승시키고자 한다. 고용되는 노동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노동자들의 힘도 증가한다. 그래서 자본가는 좀 더 말 잘 듣는 노동자들을 구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된다. 과학·기술은 자본가들의 그러한 고민에 해결책을 제시해주었다. 바로 기계가 그것이다.

    기계가 공장에 도입되어 노동자들이 할 일을 많은 부분에서 대신하게 된다. 기계에게는 임금을 줄 필요도 없고, 기계는 파업을 하지도 않는다. 또 기계는 인간 노동자보다 더 많은 시간 동안 일할 수 있고, 더 빨리 더 많은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 이렇게 되자 노동자들은 점점 일자리를 잃게 되고, 일자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더 많은 임금을 요구하기 힘들게 된다. 그래서 상품은 점점 더 많이 생산되고, 노동자는 점점 더 가난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자본에게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한다. 상품은 기계의 도입으로 이전보다 더 많이 생산되지만 그 상품의 소비자들은 점점 더 가난해져서 그 상품을 살 돈이 없는 것이다.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은 사실 노동자의 가정에서 소비되는 것인데, 자본가가 모든 상품을 다 소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게다가 자기가 번 돈을 자기가 만든 상품을 구매하는 데 모두 소비해버리면 남는 것도 없다. 노동자는 임금이 줄어들어 상품을 살 수 없게 된다.
    즉, 공장에서 생산된 상품은 창고를 가득 채우지만 그것을 소비해야 할 노동자의 가정에는 돈이 없는 상황이 닥쳐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본가는 더 이상 잉여가치의 실현, 즉 이윤을 획득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바로 공황이다. 더 많은 이윤을 위한 결정이 오히려 이윤 획득을 가로막는 역설. 마르크스는 이러한 역설이 자본의 논리에 필연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말한다.

     

     


    자본의 다른 이름은 사회적 관계

    자본이 가치를 증식하는 과정은 우리에게 자본이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 속에서 가치를 증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단순히 자본가와 노동자의 개인적 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관계는 사회적 관계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자본가 계급뿐만 아니라 반드시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할 수 있는 힘 밖에 없는 노동자 계급이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4) 자본가는 노동자 없이는 잉여가치를 생산할 수 없다. 자본의 최대 목적인 이윤의 획득, 즉 가치의 증식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자본은 그 자체로 관계이다.

    더욱이 노동자 계급은 바람이나 공기와 같은 자연적 산물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그들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의 산물임을 보여준다. 자본주의가 성립되던 초창기에 귀족들은 토지를 통하여 돈을 벌기 위해서 각종 법령과 폭력을 동원하여 토지로부터 농민들을 몰아낸다. 이렇게 토지로부터 쫓겨난 수많은 농민들은 유민이 되었고, 이 유민들이 도시로 흘러 들어와 노동자 계급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한 축인 노동자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의 변동을 조건으로 하여 형성되었고 자본가들은 그와 같은 사회적 조건 위에서만 노동력을 구매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노동력 말고도 또 다른 것을 팔 수 있다면 어느 누구도 자신이 실제로 일한 시간보다 더 적은 임금을 받고 노동하려 들지는 않을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것이 가능한 사회적 관계가 확보되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 잉여가치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 잉여가치의 생산, 즉 가치의 증식은 이와 같이 특정한 사회적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사회적 관계 그 자체를 '자본'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자본 밖으로!

    자본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자본가치 증식과 관련되지 않는 다른 사회적 관계의 영역을 남겨두지 않으려고 한다. 가치의 증식, 이윤의 획득, 즉 돈벌이를 사회적 관계의 기본적인 원리로 만들고, 사회적 활동의 기본적인 목표로 만들려는 경향을 자본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발전'하는 사회가 바로 자본주의 사회이다. 이런 사회에서 돈벌이가 되지 않는 활동은 '무가치'한 것이 된다.

    어느 순간 다니던 직장에서 '짤려' 노숙자가 되어 떠도는 사람들, 직장이 없어서 친구들에게 '빌붙는' 백수들,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 불완전하다고 판단되어 취직을 못하는 '장애인' 등. 노동을 통한 가치 증식 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가치'한 사람들로 여겨진다. 그뿐인가? 가치 증식을 위해서는 수많은 생명이 살아가는 터전인 갯벌을 메워서 산업단지를 만들고, 이윤을 남길 수 없는 약품은 꼭 필요한 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생산되지 않는다.

    돈벌이가 되지 않는 갯벌의 무수한 생명들은 더 이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 가치가 없는 존재들이며, 돈벌이가 되지 않는 약품 또한 만들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서 보여주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원리이며, 우리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자본론』은 자본주의가 결코 인간 본성의 산물이거나, 자연법칙과 같은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특정한 방식이며 자연과 관계를 맺는 특정한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 즉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또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관계가 맺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2,5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분량의 『자본론』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꼼꼼하게 분석하고 있는 이유도, 자본주의와는 다른 사회적 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착취함으로써만 가치를 증식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상품은 넘쳐나지만 그 상품을 생산한 노동자들은 그것들로부터 소외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자본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인 가치를 지니지 못한 것은 아무리 필요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도 모두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리는 자본주의. 마르크스는 이런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들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이런 자본주의라는 사회적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원하느냐고. 이제 자본 밖으로 나가고 싶지 않느냐고. 그래서 다른 사회적 관계를 만들고 싶지 않느냐고 말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형태의 사회적 관계를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 '자유로운 인간들의 공동체'의 또 다른 이름이 바로 마르크스가 평생을 받쳐 실현하고자 했던 꼬뮨 주의인 것이다.

     

     


    더 생각해볼 문제들

    1. 가치는 추상적인 인간의 노동시간에 의해서 측정된다고 했다. 인간의 노동시간만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이러한 생각을 '노동 가치론'이라고 한다. 하지만 똑같은 노동시간을 들여서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진 양복이라고 하더라도, '알마니'라는 브랜드를 달고 있는 양복과 '얼마니'라는 브랜드를 달고 있는 양복의 값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 이러한 가격 차이는 브랜드의 차이에서 나는 것이다. 브랜드가 만드는 이러한 가격 차이를 브랜드 효과라고 하며 이것은 현대 자본주의가 이윤을 얻는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브랜드 효과는 과연 노동 가치론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

    2. 많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자본론』을 정치·경제학의 완성이라고 이해한다. 그러한 이해는 『자본론』의 많은 내용이 스미스나 리카르도와 같은 정치·경제학자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일부는 맞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론』의 부제를 '정치·경제학 비판'이라 붙였고 『자본론』 1권을 출간하기 전인 1859년에 그 책과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이는 마르크스에게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마르크스는 비판이 '하나의 무기'라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비판의 본질적 파토스는 분노이며, 비판의 본질적 작업은 탄핵"인 것이다. 이런 의미로 비판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마르크스에게 정치·경제학 '비판'이 단순히 기존 정치·경제학의 문제점을 논박하여 정정하고 완성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추천할 만한 텍스트
    『임금노동과 자본』, 카를 마르크스 지음, 박종철 출판사, 1999.


    각주
    1) 당시 영국에서 1파운드는 20실링, 1실링은 12펜스라는 화폐 제도가 유지되었다.
    2) 코뮨주의란 'Communism'을 번역한 말이다. 원래 이 영어 단어는 흔히 공산주의(共産主義)라고 번역되어 왔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함께 생산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용어로써 Communism에서 경제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하는 면이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저작 전체에서 Communism은 경제적 활동에 국한되지 않고 전 사회적 관계를 포괄하는 용어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적 맥락에서 Communism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공동체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Commune을 부각해 코뮨주의라고 옮기기로 한다.
    3) 추상적 인간 노동이란 어떤 노동활동의 기본 단위를 이루는 가장 단순한 노동을 말한다. "복잡한 노동은 단순노동이 강화된 것이며, 적은 양의 복잡 노동은 보다 많은 양의 단순노동과 동등하게 간주된다"라고 마르크스는 말한다.
    4) 공장이나 기계 혹은 생활비 이외에 투자할 수 있는 여유분의 화폐 등 생산에 필요한 수단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에 따라 계급이 나뉜다. 자본가 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이고, 노동자 계급은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계급이다.

     

     

     

    칼 마르크스는 누구인가?

    칼 마르크스 (Karl Marx 1818년 ~ 1883년)는 정치학자이자, 경제학자, 철학자이다.
    대표 저서로 « 자본론 »을 집필하였고 과학적 사회주의·공산주의 창시자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유태인에 대한 불이익을 피하고자 마르크스가 태어나기 직전에 개신교로 개종한 집안에서 마르크스는 6살이 되던 1824년에 개신교 세례를 받았다. 12 살이 되던 1830년에 마르크스는 트리어에 있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김나지움에 들어갔다. 마르크스는 이곳에서 라틴어, 그리스어, 역사, 철학 등을 배우며 말 그대로 교양 있는 젊은이로서 이후의 삶을 준비할 수 있었다.
    1835년 8월 김나지움을 졸업하면서 열일곱 살의 마르크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고찰("Betrachtung eines Jünglings bei der Wahl eines Berufes")」(MEW, Ergänzungsband 1, S.591-4에 실려 있음)이라는 졸업 에세이(Abiturienarbeit) 중의 하나에서 “우리는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자리를 반드시 얻지는 못한다. 사회에서 우리의 관계들은 우리가 그 관계들을 규정할 위치에 이르기 전에 이미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반동적 성향이 강한 프로이센 체제에서 현실의 문제를 다루는 기사들을 쓰면서 마르크스는 점차 정치와 사상의 문제에서 경제 문제로 관심을 이동하기도 하였다. 훗날의 마르크스 자신의 표현대로 하자면 ‘상부구조’의 문제에서 ‘토대’의 문제로 관심이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반정부적인 내용이 가득한 글로 인해 1843년 3월 18일 마르크스는 편집장직에서 쫓겨나야 했으며, 그 신문도 곧이어 폐간되고 말았다.

    파리로 이주하였으나 프로이센 정부의 압박으로 프랑스에서도 추방을 당하고 브뤼셀로 거주를 옮겼으나 이번에도 프로이센 정부가 추방하려 하여 고소를 면하고자 독일의 국적을 포기하였고, 무국적 상태로 생을 마감하였다.

    마르크스는 1856년부터 집필을 시작하여 1867년에 『자본론』 제1권을 출판한다. 『자본론』은 상품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하여 자본을 중심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를 밝히면서 나아가 자본주의가 내적 모순에 의해서 붕괴될 수밖에 없음을 규명하고 있다. 여기에는 노동 가치설, 잉여 가치와 착취, 생산 부문 간의 불균형적 생산,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실업자의 증가, 공황의 발생 등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원리와 그 문제점을 분석한 풍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자본론』 1권은 생전(1867년)에, 그리고 2권(1885)과 3권(1994)은 사후에 엥겔스에 의해 출판되었다.

    출처 - 서양의 고전을 읽는다, 2006, 5,22
    네이버 백과 - 칼 마르크스

     

    ————————————————————————————

    마르크스가 말하는 자본이 얽힌 사회적 관계가 꼭 자본주의에서만 생긴다고 보진 않는다. 마르크스가 말하는 꼬뮨 체제에 사는 사람들은 항상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고 살 것이라고도 생각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런 욕망으로 인해 발전을 이루어온 것은 사실이다.
    신분과 계급을 정하고 인간을 구분하는 차별은 오랜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 왔고, 인간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다.
    체제가 바뀐다고 모든 인간이 서로를 평등하게 보고 자유롭게 살진 않을 것이다. 뛰어난 누군가는 그보다 덜 뛰어난 누군가의 머리 위에 설 것이고, 누군가는 그 뛰어난 자를 신격화하고 추앙할 것이고, 그리고 그에 관심 없는 다른 누군가만 있을 뿐이다.
    같은 노동자라도 그 사이에는 언제나 차별이 있고 모든 사회에는 보이지 않는 벽과 차별, 집단이 형성되어 있다.
    자본이 얽혀있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고,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체제에서, 개인이 생각하는 가치 있는 활동을 하며, 가치있는 관계를 맺고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가정은 모든 인간이 순수하다는 전제하에서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Designed by Tistory.